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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년 11월 17일

한참 전에 에세이 출간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 감사한 한편 놀라운 마음이었다. 그런 제안을 해준 출판사에 무척 감사하면서도 나는 제안을 수락하기까지 되게 많은 고민을 해야 했다.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일인가? 하는 고민이 먼저 들었고, 내가 쓴 책을 과연 누가 읽고 싶을까? 하는 고민도 들었다. 이런 고민은 사실 자연스러운 반응이고 피할 수 없는 고민이다. 그런데 답 없는 고민이 꽤 길게 이어져서 나도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아무래도 선뜻 마음먹을 수가 없으니 그랬을 텐데, 나는 곧 본질적인 면을 고민했다. 책은 왜 쓰는 걸까. 혼자 글 쓰는 일에 만족하지 못하고 책 쓰는 일에 도전할 이유는 무얼까. 지금도 여전히 고민하고 있다. 실은 몇 번이나 책 쓰는 일을 시도했고, 작업을 이어가보려고 했으나 번번이 그만두게 된다.

책을 써야 하는 이유가 분명치 않은 데 반해 책을 쓰지 말아야 할 이유는 많다. 내가 하는 일이 책 만드는 일이라 더 그렇다. 책을 쓰는 일의 고역이 얼마나 큰 지 너무 잘 알고, 책으로 주어지는 보상이 변변치 않다는 것도 잘 알며, 책을 낸다고 해서 꼭 기대한 반응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도 너무나 잘 안다. 사실상 책을 써야 하는 이유보다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해야 한다고 결론내리는 쪽이 현실적으로 마땅해 보인다. 그런 까닭에 나는 책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마다 되묻곤 했다. 책을 ‘왜’ 쓰고 싶은지. 그 명확한 이유를 알면 도움이 될 듯싶으니까. 이유가 분명해지길 바랐다. 그래야 한 글자라도 써질 것 같았다.

언젠가는 그 이유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표현하고 싶어서’. 표현하고 싶어서 우리는 글을 쓰고 그걸 엮어 책으로 만드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 계기가 있었다. 한 활동가분께 화성외국인보호소(수용소)에 갇힌 피해자의 이야기를 듣던 중이었다. 수용소에 부당하게 수감된 이가 있었다. 그가 경찰과 다른 수감자와 특히 자기 자신에게까지 피해를 주는 행동(고성과 난동과 자해)을 멈추지 않자 하루는 그의 구금 해제를 위해 조력하던 활동가가 그에게 물었다. 힘든 마음은 알지만 왜 이렇게까지 하느냐고. 그러자 그가 오히려 놀라면서 대답했다. “왜 이러냐고요? 나는 지금 표현하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멍해졌다. 시간이 지나 이 말을 자꾸 생각했는데, 나는 우리가 써야 하는 이유도 그의 이유와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표현하기 위해서다. 그의 대답은 내게 해방감을 줬다. 덕분에 나는 표현을 하는 데 있어서 보편 영역을 설득하기 충분한 이유가 필요한 것이 아님을, 달리 말하면 표현에 자격이 필요한 것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한편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럼 표현하는 일은 전적으로 좋은가? 하지만 왜 어느 때는 표현하고 싶고, 어느 때는 표현을 삼가고 싶을까. 그리고 표현이란 과연 무엇에 좋은 걸까? 표현이 무언가를 바꾸고 있는가? 이를테면 표현이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가? 세계를 나아지게 하는가? 표현은 개인이 느끼는 억압을 일시적으로 해소시키는 데만 도움되는 것은 아닌가? 그것의 효용이 분명치 않고, 동기 또한 일시적이거나 파편적이라면, 표현을 내뱉는 것과 표현을 참는 것 사이의 차이는 과연 무엇일까?

나는 주제 넘게도 표현의 실효를 따졌다. 수용소에 구금된 피해자의 말을 곱씹으면서 이런 고민을 한다는 사실이 죄스러웠다. 그럼에도 나는 답을 찾고 싶었다. 저 물음들은 마치 세면대에 채웠던 물을 내릴 때 생기는 소용돌이처럼, 같은 자리를 뱅뱅 맴도는 느낌으로 내 안을 휘저었다. 그런 의구심 속에서 나는 곧바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책 쓰는 이유가 분명치 않다고 여기는 그 의구심 가득한 지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결과 나는 또 다시 무척 자연스럽게도 ‘안 쓰는 사람’으로 돌아가 예전처럼 살 수 있었다.

그러다가 한번은 약간 다른 각도에서, 내가 책을 쓰고 싶어 하는 이유를 짐작해본 적이 있다. 『구술문화와 문자문화』라는 책 덕분이었다. 이 책을 읽도록 안내한 것은 팀 잉골드의 『라인스』 1장의 내용이었다.

옹의 책의 논의에 따라, 지금 우리가 속한 정신문화를 ‘문자문화’로 이해하자 그동안 깨닫지 못하던 무언가가 별안간 선명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날 우리는 문자가 기억을 나르고, 문자가 정신의 역할을 담보하는 시대를 살고 있구나. 늘 그랬던 것으로 생각하지만 과거엔 그러지 않았다. 문자문화 시기 이전 구술문화 시기에는 문자가 아닌 말(구술)이 그 역할을 했다. 대략 플라톤 시기 때부터 다양한 사회적이고 정신적인 기능을 우리는 말 대신에 문자에 위탁하며 살게 되었다… 옹의 책을 통해 이런 이야기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즈음 새롭게 든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혹시 내가 책을 쓰고 싶다고 욕망하는 까닭은 이런 이유 때문은 아닐까. 알게 모르게 문자문화의 권위와 보호 속에서 살아온 사람으로서, 책을 씀으로서 문자문화의 일원으로 인정받고자 바랐던 것은 아니었을까? 책을 씀으로써 문자문화 세계 속에 내가 합당히 머물 장소를 마련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인정받는 구성원이 되고 싶은 욕망이 있지 않았을까. 책 쓰기가 문자문화 세계의 거주민이 되는 방법으로 보였던 것은 아닐까. 그러한 그 생각이 들었을 무렵에 이반 일리치의 『텍스트의 포도밭』과 『ABC,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를 다시 꺼내 읽어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책을 써서 문자문화의 일원이 된다’는 생각은 너무 순진하고, 그것만이 내 욕망의 실체였다고 여기기는 어려웠다. 그보다 더한 뭔가가 있지 않았을까. 비록 마음 깊은 곳에는 내 잠재된 생각과 기억과 경험들이 문자로 형상화되는 정신세계에 대한 깊은 애착이 있었다고 하더라도(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것과 문자문화의 생산자 구성원이 되고 싶다는 욕망은 종류가 다른 것으로 보였다. 그럼 나는 왜 책이 쓰고 싶었을까.

이런 고민을 되풀이하다가 깨달은 것은, 어쩌면 나는 책을 쓰고 싶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저 나도 책을 쓰면 좋겠다 정도의 기분을 관성으로 이어왔을 뿐. 정말로 간절히 책을 쓰고 싶은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간절하지 않았기에, 이제껏 책을 안 써도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까지 안 쓴 것이고, 그러니 이제까지 못 쓴 것이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내게는 치열한 열망이 없다고. 이를 깨닫고 나자 기분이 후련했다. 그렇구나. 간단했구나.

최근 며칠 동안 몰두해서 읽은 책은 『팀 잉골드의 인류학 강의』다. 고백하자면 예전에 이 책을 과소평가하며 얕잡아 본 적이 있다. 이 책을 소개할 일이 생겼을 때 “그 얇은 책…”이라고 말하고서 넘어갔는데, 나는 속으로도 이 책의 내용이 그다지 특별한 구석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잉골드가 주요 저작들을 쓰는 사이에 소품처럼 쓴 책이라고만 생각했더랬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읽으니 과거의 내가 부끄러울 정도로 무척 좋은 책이다.

잉골드는 자신에게 인류학이란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과 함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탐구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탐구의 방식으로 무척 중요한 것은 배움이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면 서로가 서로에게 ‘경험’과 ‘상상력’을 배워야 한다. 잉골드는 이것이 중요한 인류학 실천이라고 말한다. 어찌 보면 무척 밋밋하고 흔한 말이지 않나. 그래서 처음에는 이 말을 대수롭지 않게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말을 자꾸 곱씹게 된다.

잉골드의 논의를 몇 가지만 언급하고 싶다. 일단 ‘우리’라는 범주. 잉골드가 말하는 ‘우리’는 인종, 성별, 능력 같은 기준에 의해 혹은 인간인지 인간이 아닌지 등의 기준에 의해 존재가 구분되는 범주가 아니다. ‘우리’는 세계를 형성하는 흐름 속의 우리 모두다. 그러니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제대로 펼치기 위해서는 아주 넓은 그물망이 필요할 듯하다.

그리고 세계는 전도되어 있고 존재는 파편화한다는 인식. 근대의 학문에서는 대개 사회적 삶과 생물적 삶을 분리해서 바라보았다. 이를테면 사회적 진화와 생물적 진화를 동떨어진 현상으로 해석하는 점도 그렇다. 하지만 잉골드가 보기에 이는 근대성이 심화시킨 파편화한 인식 중에서 대표적인 것으로, 살아가는 존재에게서 사회적 삶과 생물적 삶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젠가부터 스스로를 분열되지 않은 통합된 존재로 인식하는 경험을 박탈당하고 있다. 통합된 존재로의 경험을 파편화되고 구별짓기된 세계 구조 안에서 잃고 만다. 생명의 사회적 삶과 생물적 삶을 분리해서 취급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단절된다.

그러니 잉골드의 논의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과 병행하는 것이다. 원래는 생명 안에 통합돼 있던 것을 우리는 언제부터 어떤 이유로 구별하고 분리하기 시작했을까? 이러한 이분법들은 언제부터 어떻게 생겨났을까? 이 뒤집힌 세계에서 우리의 삶은 어디로 무엇을 향해 이어져야 하는가? 잉골드는 『라인스』를 쓸 때 처음 가졌던 질문이 ‘어떻게 말과 노래가 구별되기 시작했을까’였다고 밝히는데, 그가 무엇에 도전하고 있는지를 아마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을 거슬러 원래 생명 안에 통합돼 있던 것들이 구별되고 분리되기 시작한 시점 중 어느 특별한 시점을 찾아가보는 것이다.

아참. 원래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읽기’와 ‘쓰기’에 대한 것이었다. 앞에서 ‘책을 왜 써야 하는가’가 내 고민이었다고 적었지만, 이번에 여러 고민을 해보다가 새삼 깨닫은 것은, 읽기와 쓰기에 대해 다른 경험과 상상력을 배우고 싶다는 갈증과 바람이 꽤 오래 전부터 이어져왔다는 사실이다.

돌이켜보건대 그 시작은 『텍스트의 포도밭』을 처음 읽었을 때였던 것 같다. 『텍스트의 포도밭』은 책의 페이지를 눈으로 바라보면서 머리로 내용을 해석하는 행위가 ‘읽기’의 전부가 아님을 알려준다. 12세기까지만 해도 읽기는 반드시 낭독이 선행돼야 하는 행위였다. 읽기는 개인이 침묵 속에서 머리만 써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당시만 해도 책 자체가 흔치 않았으며, 더군다나 띄어쓰기가 발명되기 전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띄어쓰기의 도움 없이 텍스트를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런 걸 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텍스트 내용을 모두 외운 특별한 사람뿐이었다. 책의 글은 ‘텍스트를 전부 외운 사람이 (바라보면서) 의미 단위로 소리 내 읽을 수 있는 문자 나열’이었고, 달리 말하면 책의 글은 표기법 자체였다. 때문에 ‘읽기’에는 언제나 특별한 낭독자가 필요했다. 낭독자가 소리 내서 단어를 발성하면, 곁에 모인 사람들은 낭독자의 목소리로 물성화된 단어를 귀에 넣었다. 일리치는 12세기에 이어지던 ‘읽기’의 풍경이 이러했음을 전해준다. 이때의 읽기는 상당한 퍼포먼스였고, 몸짓을 수반하는 깊은 묵상에 가까웠다.

십수 년 전 처음 이러한 ‘읽기’에 대해 들었을 때 당연히 무척 인상적이었으나, 이런 사실이 지금의 나의 읽기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지를 상상해보지는 못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라인스』를 읽으며, 내게는 뜻밖에도 12세기의 읽기의 풍경이 자꾸 떠올랐다. 다른 읽기의 경험을 통해 다른 상상력을 배울 수 없을까. 이전까지 나는 주로 이런 걸 고민했던 것 같다. ‘나는 무얼 읽고 싶나’ ‘나는 무얼 쓰고 싶나’ 같은 생각들. 그리고 지금의 읽기와 쓰기의 대상들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궁금해했다. 그런 고민은 늘 이런 생각으로 수렴했던 것 같다. ‘무얼 읽어야 하나’, ‘무얼 써야 하나’. 하지만 꼭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을까. 다르게 생각하면 늘 ‘읽기’와 ‘쓰기’는 계속되고 있으며, 그 속에서 세계가 생겨나는 것은 아닐까? 더군다나 읽기와 쓰기는 꼭 문자 도구로만 이뤄져야 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지 않나? 읽기와 쓰기를 꼭 언어 행위로 생각하지 않으면 어떨까.


하늘을 바라보는 일? 읽기다. 빗방울이 피부에 닿는 감촉을 느끼는 일? 읽기다. 밤하늘의 별의 반짝임을 보는 일? 읽기다. 동네 고양이가 이동한 자취를 알아보는 일? 읽기다. 고속도로 표지판 사인에서 이상한 점을 알아차리는 일? 읽기다. 조리법의 미묘한 변화로 음식 맛이 달라진 것을 깨닫는 일? 읽기다. 산길에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 발을 어디를 디딜지 살피는 일? 읽기다.

그럼 손을 움직여 무언가 쓰는 동작은? 쓰기다. 걷는 일은? 쓰기다. 바다를 헤엄치며 물살을 가르는 손에 가하는 힘은? 쓰기다. 점액을 묻히며 나아가는 달팽이의 자취는? 쓰기다. 털실로 목도리를 뜨는 것은? 쓰기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빛을 캔버스에 그리는 일은? 쓰기다. 텃밭에 조르르 시금치를 심는 일은? 쓰기다. 감자를 심으려고 흙을 올려 기다랗게 두둑을 쌓는 일은? 쓰기다.


읽기와 쓰기는 사실 어디로든 어떻게든 이어지는 열린 경험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세계는 배우고 싶은 이들의 방랑을 기다리는 충만한 성소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나.


최진규, 「읽기와 쓰기의 대화」, 『어떤 읽기』, 어떤출판연구회, 2024

  • 2024년 11월 17일

2014년에 포도밭출판사를 시작하면서 나는 무척 신이 났다. 그때는 땡땡책협동조합이라는 곳에서 막 활동을 시작하는 때이기도 했다. 그러니 더 신났을 것이다. 밖에서는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면서 좋은 자극을 주고받고, 일상적으로는 내 가게(?)에서 일한다는 사실이 나를 그토록 신나게 만든 게 아닌가 싶다.

당시의 나는 사람들의 멋진 모습을 볼 때마다 그 사람이 책으로 보였다. 누군가 몹시 뜨거운 글을 쓰는 사람을 알게 되면 그에게 가서 나랑 뜨거운 책을 만들자고 청했다. 누군가 몹시 차가운 글을 쓰면 그를 찾아가 나랑 차가운 책을 만들자고 청했다. 누가 말을 단단하게 하는 모습을 보면 그를 찾아가 나랑 단단한 책을 만들자고 청했고, 누가 다른 이의 말을 듣는 힘이 아주 강한 것을 알게 되면 그를 찾아가 나랑 듣는 힘이 강한 책을 만들자고 청했다.

잔뜩 신이 나서 ‘나랑 책을 만들자’고 청하는 나를 저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나의 인상은 아마 이랬을 것 같다. 잘 웃는 사람. 뭐가 기분이 좋은지 많이 웃는 사람. 그때 찍힌 사진들을 보면 실제로 나는 늘 벌건 얼굴을 하고는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게다가 몸을 세차게 흔들고 있는지 형체가 또렷하게 찍힌 사진이 드물다. 그리고 사진마다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별한 포즈가 하나 있다. 행복이 절정에 달한 얼굴인 나는 한 손을 상대에게 쭉 내밀고 손가락 하나를 치켜올려 상대와 부딪히고 있다. 엄지 도장을 찍고 있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의 멋진 모습이 보이면 꼭 그에게 같이 책을 내자고 졸랐고 그가 긍정적으로 응하면(혹은 아직 다 넘어온 건 아니더라도 여지가 보이면) 엄지 도장을 찍자고 요청했다. 나는 엄지 도장 방식으로 무척 많은 계약을 했다. 그렇게 맺은 계약 중 열에 여덟은 신성히(?) 이행되어 책 출간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만든 책들이 포도밭출판사의 출간 목록 중 절반을 훌쩍 넘어 대부분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나도 나지만 저분들은 무슨 생각으로 엄지 도장을 믿은 걸까.

물론 정식 계약서를 안 쓴 건 아니다. 엄지 도장을 찍고 돌아와 구체적인 기획안이 오간 후에는 정식으로 계약서를 쓰고 날인을 하고 계약금을 송금한 다음 작업을 시작했다. 그럼 엄지 도장에는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정식 계약서를 쓰기 전까지의 ‘찜’ 같은 의미일까. 그저 장난이었을까. 돌아보건대 내게는 엄지 도장 자체가 의미 있고 중요했던 것 같다.

엄지 도장은 글을 쓰고 책을 내는 일을 가볍게 만들어주었다. 내가 멋지다고 생각하여 접근(!)한 분들 대부분이 출간 제안을 받기 전에는 자신의 멋짐이 책으로 엮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까닭에 자주 되묻는 말이 있었는데 “망하면 어떡해요?”였다. 보통 망할 리 없다고 설득하는 게 맞을 텐데 나는 그러지 않았다. 왜냐면 나 역시 지금 추진하려는 기획이 상당히 높은 확률로 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새삼스레 망함이란 뭘까를 생각해 본다. 망함의 기준도 때에 따라, 처한 상황에 따라 상당히 자의적인 게 아닌가 싶다. 출판에서 ‘망했다’고 할 때는 ‘책이 생각보다 안 팔리는 결과’를 일컫는 것일 텐데, 이때 책을 많이 파는 방향 대신 저 ‘생각’의 기대 수준을 낮추는 방향을 선택하면 구원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정말로 이 방향으로 일을 추진했고 저자를 설득했다.

“우리 돈 들어가는 거 없어요. 글은 당신이 쓰고, 편집이랑 디자인은 제가 할 거고, 종이값이랑 인쇄비에만 돈이 들어가는데 그건 300부만 팔아도 세이브가 돼요. 우리 책이 300부가 안 나가겠어요? 그렇잖아요. 우리는 망할래야 망할 방법이 없어요. 걱정 말고 고고.”

이때 상대가 걱정을 조금 누그러뜨리는 표정을 지으면 얼른 엄지를 내밀어 도장을 찍는 것이다. 나는 이런 식으로, 돌아보니 약간 사기꾼처럼 ‘지속 가능’한 출판을 해왔다.

내가 해온 이런 출판 방식에는 난점이 있는데, 책은 많이 팔릴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저자와는 인연을 맺을 수 없다는 점이 가장 대표적인 난점이다. 그리고 자기 책이 많이 팔리길 바라는 저자에게 출판사가 저러한 태도를 내보인다면 그 즉시 출판사 평가 점수가 마이너스 마이너스 마이너스가 되는 것을 넘어 저자에 대한 무례를 저지르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당신의 압도적으로 훌륭한 책을 3,000부 아니 30,000부 책임지고 팔아보겠습니다”라고 하지 않고 “우리 책이 300부가 안 나가겠어요?”라고 한다는 것은 혼신의 노력을 다해 집필에 임하려는 저자를 모욕하는 말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도 또 하나의 곤란한 점이다. 그러니 결코 함부로 시도해선 안 될 일이다. 그런데 나는 왜 이제껏 이렇게 함부로 해왔는지 모르겠네. 게다가 결정적인 문제가 있는데, 이런 방식은 대량복제생산이 덕목인 출판의 속성상 무척 치명적으로 몹쓸 방식이다. 이처럼 여러 곤란한 지점들이 있는데 이에 대한 내 입장은 이렇다. ‘하지만 어쩌랴.’



지금 깨닫는 것인데, 아마도 이제껏 나는 내가 아는 친구들의 멋짐을 증언하고 기념하기 위해 책을 만들어온 것 같다. 그리고 그걸 해내는 현실적인 방법으로는, 돈보다는 시간을 써서 일하는 방법이랄까? 책이 많이 팔리기를 바라기보다 안 팔려도 괜찮은 상황에서 일을 하려고 노력해 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점에 대해 미련이 생길 것 같으면 열심히 딴생각을 하면서 ‘하지만 어쩌랴’를 되뇌었다. 이렇게 못 미더운 나와 엄지 도장을 찍어주고 좋은 글을 써서 보내준 고마운 친구들이 있어서 지금까지 책을 만들어왔다.

친구들의 멋짐을 증언하고 기념하기 위해 시작한 포도밭출판사는 이제 9년차다. 내년이면 10년을 채우게 되는구나. 내년에도 이 일을 계속 해내갈 수 있기를 바라지만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원래 미래 따위 없어도 잘만 살아왔다. 아직 희망은 있으니까 괜찮다.

내게 ‘미래 말고 희망’이라는 금언을 마음에 새기게끔 만든 사람은 바로 이반 일리치다. 이반 일리치는 어느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래는 삶을 잡아먹는 우상입니다. 우리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오직 희망만이 있을 뿐입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이반 일리치는 포도밭출판사에도 여러 모로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이따금 포도밭출판사의 이름을 어떻게 지었으냐는 질문을 받을 때면 나는 다음처럼 답을 한다. “포도밭출판사가 있는 옥천이 바로 ‘포도의 고장’이고, 제 외삼촌도 옥천에서 포도농사를 하셨기 때문에 출판사 이름을 ‘포도밭’으로 지었습니다.”

이것도 중요한 이유가 맞기는 한데, 사실 그동안 별로 말한 적 없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서울을 떠나 옥천에 와서 출판사를 차리기 전에, 나는 다니던 회사에서 이반 일리치의 『텍스트의 포도밭』이라는 책을 펴내려고 기획했다. 생각보다 일찍 그 회사를 관둔 탓에 내가 편집까지 맡지는 못했지만 그 책은 다른 분들의 손길을 거쳐 얼마 후 멋진 모습으로 출간되었다. 나는 비록 번역에 착수하기 전이었지만 이 책의 원서를 읽을 수 있었고, 거기서 읽은 ‘포도밭’의 비유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일리치는 12세기까지만 해도 ‘독서’란 지금과 같이 혼자된 공간에서 눈으로 글자를 읽는 일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인 곳에서 글자를 ‘소리 내서 읽고 듣는 행위’였다고 말한다. 당시 독서는 이렇듯 머리를 쓰는 일이 아니라 몸을 쓰는 일에 가까웠고, 함께하는 노동으로서의 의미가 무엇보다 컸다는 것이다. 여기서 되게 아름다운 묘사가 등장한다. 저 당시의 ‘독서’란 수도사들이 수도원에 속한 포도밭의 포도시렁 사이를 오가며 포도송이 열매들을 하나씩 음미하고 보살피는 ‘노동’과 같은 차원이었다고 한다. 단지 비유가 아니라 실제 인식하기로도, 행간들은 포도밭 이랑들이고 단어들은 포도 열매들이었다는 말이다. 포도나무 줄기가 양쪽으로 갈라진 모습을 일컫던 ‘스프레드’란 말은 오늘날 ‘펼침면’을 칭하는 말이 되었고, 처음에 포도시렁이 이랑마다 줄지어 드리워진 모습을 일컫던 파지나(pagina)라는 말은 오늘날에 와서는 쪽(page)이라는 단어가 되었다.

이런 이야기들을 읽으니 ‘포도밭’이라는 말이 너무 좋을 수밖에. 그래서 나는 출판사 이름을 포도밭출판사라고 짓는 데 전혀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이반 일리치 할아버지는 충북 옥천의 한 출판사 이름이 ‘포도밭출판사’가 된 까닭이 자기 때문인 걸 알 리가 없고 나는 이런 일들이 무척 기쁘다.

그리고 내가 지금과 같은 ‘친구 중심’ 출판을 하게 만든 데 영향을 미친 또 하나의 단어가 있다. 파구스(pagus)라는 라틴어. 파구스는 동네, 지역, 시골 등을 의미하며 ‘산책하고 싶어지는 경작지’라는 풀이도 있다. 앞에서 라틴어 파기나가 쪽을 의미한다고 했는데, 누군가는 파기나보다 파구스라는 말에서 쪽이라는 말이 가리킨 본래 의미를 짐작하기도 한다. 여기에도 꽤 그럴싸한 근거가 있다. 경계석으로 구분된 경작지(파구스)들을 산책하는 행위가, 쪽에서 쪽으로 건너가며 단어들을 음미하는 독서의 모습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출판의 이상은 이런 게 아니었나 싶다. 파구스적 의미의 쪽들을 만들어가는 것. 왜냐면 나는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기분으로 책장을 넘길 때가 좋다. 그러려면 책을 만들 때도 조금은 그처럼, 즉 어슬렁어슬렁한 마음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다짐(?)들이 쌓여서 엄지 도장 방식의 계약을 낳았다고 문득 주장하고 싶다. 어느 한가한 날에 동네를 걷다가 우연히 친구를 만나 “야, 날도 좋은데 같이 산책이나 할까?”라고 말할 때처럼, 저자에게도 “오, 나랑 책이나 낼래요?” 하는 느낌으로 출판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 쪽 한 쪽 만들어가는 것이 출판 일을 하면서 내가 지키는 희망이다.


최진규, 「엄지 도장」, 『어떤 계약』, 어떤출판연구회, 2022


  • 2024년 11월 17일

보름 전부터 우리집에 화장실 환풍 배관을 통해 다른 집에서 피우는 담배 연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담배 연기는 잠깐 희미하게 나다 사라지는 수준이 아니라 거의 흡연자가 코앞에서 연기를 뿜는 것처럼 화장실로 잔뜩 들어왔고 그 냄새는 곧 집안 전체에 가득 퍼졌다. 생활하기 힘들 정도였다. 횟수도 문제였다. 평일에는 아침 6시에서 7시 사이에 서너 차례, 밤 8시에서 10시 사이에 서너 차례 담배 냄새가 올라왔다. 주말에는 거의 하루 종일 수시로 냄새가 났다.

지금 사는 704호에 이사 온 지는 5년째인데 이런 일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누군가 엄청난 골초가 윗집 혹은 아랫집에 새로 이사 왔나 싶었다. 연기는 아무래도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니까 좀더 의심스러운 건 아랫집이었다. 그런 심증이 커질 수밖에 없는 건 아랫집인 604호에 한 달 전쯤 새로운 사람이 이사왔다는 소문을 최근에 들었던 것이다. 그렇다 보니 담배 연기가 날 때마다 당장 아랫집으로 달려가 문을 두드릴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의심스럽다고 해도 함부로 단정할 수는 없는 일. 일단은 보다 정중한 방법으로 신중하게 호소해보기로 했다.

처음으로 한 것은, 엘레베이터에 안내문을 붙인 것이다. 대략 이런 내용으로 안내문을 써서 엘레베이터 사방 벽 중 삼면에 붙였다.


“화장실에서 담배 피우시면 안 됩니다. 담배 피우시는 본인의 집보다 다른 집으로 냄새가 더 많이 올라갑니다. 화장실 배관으로 담배 연기가 올라와서 저희 집은 집안 전체에 연기가 가득찹니다.너무나 괴롭습니다… 집안에서 담배를 피우시면 안 됩니다. 다른 집에 고통을 주는 행동입니다.”


대략 이런 내용을 적어 엘레베이터에 붙였다. 종이를 붙이는 동안 누가 나를 목격할까봐 무척 떨렸고, 한 번은 엘레베이터가 사람을 태우려 멈추는 기미에 놀라 붙이던 종이를 확 뜯어 가방에 넣기도 했다.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서 한 행동이었다.

종이를 붙이고도 마음이 무척 불편했다. 이런 종이 또한 일종의 공해가 되진 않을까. 누군가는 자신과 상관 없는 이런 경고 아닌 경고를 읽는 게 불편하고 불쾌하겠지. 아무리 부드럽게 썼다고 해도 말이다. 나는 속으로 다짐하길 ‘딱 하루만 붙였다 얼른 떼자’고 생각했고 만 하루가 되기도 전에 떼고 말았다. 그러면서 은근히 기대를 했다. 글을 읽었다면 이제 안 피우지 않을까. 하지만 결과는 역시… 담배 연기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내가 너무 소심했구나, 반성(?)을 했고 다시 한번 종이를 붙이기로 했다. 다시 안내문을 붙이기 전에 관리사무소에 한번 찾아갔다. 금연 안내 방송을 부탁드릴 셈이었다. 관리소장님과 청소해주시는 분이 사무실에서 이야기 나누고 계셨다. 내가 이러쿵저러쿵 자초지종을 말씀드리자 두 분은 뜻밖에도 내게 여러 응원(?)의 말씀을 해주시면서 몇 가지 팁도 알려주셨다. 안내문을 그렇게 맥없이 쓰면 안 된다는 것이다. 특히 이 말을 꼭 적으라고 했다.


‘담배 피우는 당신. 몇 호인지 알고 있다.’

당신이 몇 호인지 알고 있는데 참는 중이다. 계속 피우면 더욱 강경한 ‘조치’를 취하겠다…. 이렇게 써야만 한다고 알려주셨다. 그리고 소심하게 하루 게시가 뭐냐고. 엘레베이터 5면(3면+양쪽 문에 하나씩)에 쫙 도배해 붙이고, 일주일 정도는 붙여놓으라고, 그래야 범인이 쬐금 뜨끔할 거라고 알려주셨다. 그래서 나는 안내문을 다시 적었다. 대체로는 앞서 적은 안내문 내용과 비슷한데 정말 저 말을 넣었다.


“몇 호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양쪽 문에 붙였다. 소장님 말씀대로 아무래도 벽보다는 문에 붙여야 확실히 보일 듯해서. 그러고 하루 이틀… 이틀째에 그 일이 있었다. 어느 주민이 안내문에 볼펜으로 메모를 남겼다. 메모의 내용은 이랬다.


“몇 층이신지? 바로 아랫층을 의심해야 할듯. (저는) 603호입니다. 저희는 담배 피우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메모를 본 순간 드는 생각은 두 가지였다. 첫쩨, 이것은 603호에서 내게 604호가 범인임을 넌지시 알려주려는 메모 아닐까? 둘째, 내가 범인을 찾아다니는 일이 불러일으키는 이런 여파가 조금 부담스럽다는 사실. 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내가 며칠 전부터 범인을 찾겠다고 엘레베이터에 안내문을 붙이고 관리사무소에도 들락날락하는 걸 누군가 본 사람이 있을 테니, 담배 피우는 사람을 찾고 다니는 사람이 704호(나)라는 게 소문이 났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지금 이 메모는 이런저런 소문을 비롯해 아파트 사정에 밝은 603호에서 내게 넌지시 범인을 알려주는 것을 수도 있지 않나? 그렇다면 이제는 정말 604호와 바로 담판을 지어야 할 차롄가?

저런 생각과 동시에 나는 한편으로 부담을 느꼈다. 이 안내문이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 확실해 보였다. 여기에다가 또 누군가 ‘나는 아닙니다’라고 쓰거나 또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어떤 메모를 남길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나는 순간 603호의 메모가 적힌 안내문을 확 떼어버렸다. 다른 벽에 붙인 종이들도 모조리 떼어버렸다.


자, 이제 어떡한담.


담배 연기는 또 올라왔다.


결국 604호에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바로 찾아가면 놀랄 테니 일단 쪽지를 전해보기로 했다. 너무 장황하지 않은 내용으로, 일단 가볍게 편지를 써서 문앞에 붙여보자. 하지만 무슨 내용을 써야 적당할지 자꾸 고민스러워서 여러 번 쓰고 지우고 하며 고쳤다. 나는 많이 에두르는 내용으로 편지를 썼다.


“안녕하세요. 저는 4호 라인 윗 세대입니다. 요새 저희 집에 담배 연기가 너무 많이 올라와 힘들게 지내고 있습니다. 혹시 604호는 담배 연기로 인한 피해 없으신지요? 피해 세대들이 모여 방법을 찾았으면 합니다. 혹시 담배로 괴로우시다면 제게 연락을 부탁드리겠습니다. 010-0000-0000입니다.”


한 시간 후 전화가 왔다.

여성 분이었다. 604호는 한달 전쯤 이사온 게 사실이었다. 지금 집에는 여성 분 혼자 살고 있고 담배는 전혀 피우지 않는다고 했다. 직장 때문에 떨어져 사는 남편이 한 달에 한 번 집에 오는데 전에 처음 이사와 딱 한 번 담배를 피운 적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자기가 엄청 뭐라고 했고 그 이후로는 꼭 나가서 피운다고. 그러고 남편은 자기 사는 집으로 떠났고 지금은 다시 자기 혼자 살고 있으므로 담배 피우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까지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나니 더는 604호를 의심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604호를 잔뜩 의심했던 나 스스로 미안한 마음이 커져서 나는 한참이나 ‘번거롭게 해드린 점’에 사과를 한 후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조금은 후련하고(의심이 끝났기 때문에) 또 조금은 허탈한 마음으로(의심이 틀렸으니까) 소파에 털썩 앉았는데 그 순간 또 담배 냄새가 맡아졌다. 나는 갑자기 불쑥… 이참에 의심의 뿌리를 아예 뽑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망설임없이 다음 행동을 했다. 아까 썼던 것과 똑같은 내용의 편지를 하나 더 썼다. 이번에는 윗집인 804호에 보내는 편지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4호 라인 세대입니다. 요새 저희 집에 담배 연기가 너무 많이 들어와서 힘들게 지내고 있습니다. 혹시 804호는 담배 연기로 인한 피해 없으신지요? 피해 세대들이 모여 방법을 찾았으면 합니다. 혹시 담배로 괴로우시다면 제게 연락을 부탁드리겠습니다. 010-0000-0000입니다.”


역시 한 시간쯤 지나 전화가 왔다. 오십 혹은 육십 정도 나이대의 여성 분 목소리였다. 이분은 일단 우리집을 걱정해주셨다. “괴로우시겠어요. 어쩌나 이걸… 얼마나 힘들었으면 온 동네방네 종이를 붙이고 다녔을까…” 약간은 나를 힐난하는 말씀 같기도 했다. 뭘 그렇게 혼자 예민해서 유난을 떠느냐고 하는 듯한. 그래서 나는 비록 그 내용은 걱정이었지만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게다가 나는 804호 아저씨가 담배를 꽤 많이 피우는 흡연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집에서 담배를 피우는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수시로 바깥을 드나들며 담배를 피우는 흡연자임을 엘레베이터에서 몇 차례 마주쳤을 때 몸에서 나던 냄새로 알고 있었다. 그러니 혹시 모를 일이지. 식구들이 아직 깨기 전 이른 새벽에 화장실 환풍기를 켜고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그일지도. 그러니 804호 여성분은 남편의 흡연을 감추고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닐까? 그러면서 나를 은근히 힐난하는 건 아닐까? 나는 조금은 그런 복잡한 의심을 품고서 통화를 했다. 하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심증일뿐 함부로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때 804호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저는 여기 살면서 집에서 담배 연기를 한 번도 맡은 적이 없어요. 그러니 참 이상한 일이네. 604호도 아니고 우리집도 아니면 어떻게 704호만 냄새가 날까요? 근데 이유가 뭐든 날마다 담배 연기 맡으면서 어떻게 산대요. 반드시 꼭 잡아서 해결해요. 경찰에 신고를 하든지 해서라도 꼭 해결해요. 그래야 살지 원….”


그 말씀을 듣다 보니 804호 역시 범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어찌 된 일일까.


정말 난관에 빠진 것이, 담배 연기는 어쨌든 여러 세대를 연결하는 쭉 이어진 환풍 배관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것인데, 604호에도 냄새가 안 나고 804호에도 냄새가 안 나는데 가운데인 704호 우리집에만 냄새가 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윗집이나 아랫집 중 누군가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아니면 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인데. 하지만 나는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다. 이 생각을 하던 바로 그 순간에도 화장실에서는 새로운 담배 연기가 맡아졌다. 분명 위아래 집 중 누군가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이다.


그때 나는 홀린듯 화장실 천장에 달린 환풍기를 분해하기 시작했다. 환풍기 안쪽에 뭔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아님 화장실 천장에 뭔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사실… 지금까지 담배 연기에만 집중했지만, 최근 심하게 맡아지기 시작한 건 담배 연기뿐만 아니라 모든 냄새였다. 반찬 냄새, 요리 냄새, 음식 냄새, 샴푸 냄새, 비누 냄새 등 온갖 냄새들이 화장실 환풍기를 통해 집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5년 동안 이런 적이 없었는데 지난 2주 동안 심각할 정도로(샴푸 냄새가 심할 땐 머리가 좀 아팠고, 담배 연기가 심할 때 속이 울렁거렸다) 온갖 냄새가 맡아졌다. 혹시 환풍 배관이나 천장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홀린 듯 환풍기 나사를 풀고 천장에서 기계 본체를 꺼내는데 그때 툭 하면서 뭔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신용카드 반만 한 크기의 작고 네모난 플라스틱 조각이었다. 이게 뭐지 하고 주웠는데, 가만 보니 환풍기 안에 들어 있어야 할 부품이었다. 조각을 한 손에 쥐고 환풍기 안을 들여다보니, 어디에 달려 있다가 떨어져 나온 부품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검색을 해보니 그건 ‘댐퍼’였다.


아파트 같은 다세대 건물의 화장실에는 주로 댐퍼 환풍기를 설치한다고 한다. 댐퍼는 환풍기가 작동(흡기 작동)하지 않는 동안 환풍 배관을 통해 냄새가 역류하지 않도록 틈을 가로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부품. 그 작은 플라스틱 조각이 화장실 공기를 빨아들일 때는 열렸다가 흡기를 멈추면 내려와 닫히는 것이다. 그 덕분에 환풍 배관에 모인 냄새들이 각 세대의 화장실로 들어가지 않는 원리. 결국 지난 2주 동안 우리집 화장실에 담배 연기가 쉼없이 들어왔던 것은 댐퍼가 고장난 탓이었다.


이 일로 몇 가지 사실을 더 알게 되었다. 사실 댐퍼 덕분에 냄새가 화장실로 들어오지 않아 몰랐을 뿐, 평소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는 집이 내가 사는 라인에만 해도 한두 집이 아니라는 사실. 누가 이렇게 아침 저녁으로 수십 대의 담배를 피우는가 했더니, 그 범인은 아무래도 한두 사람이 아닌 것이다. 여러 사람이 여러 집에서 여러 대를 피우고 있으며, 그 냄새는 환풍 배관을 따라 오르내리다가 댐퍼가 고장난 집으로 집결한다. 음식냄새 샴푸냄새 등도 마찬가지. 각 세대에서 흡기된 모든 냄새는 환풍 배관를 타고 떠돌다 댐퍼가 고장난 집으로 집결한다.

댐퍼 기능이 있는 새로운 환풍기를 사서 다니 냄새는 바로 사라졌다.


덕분에 2주 동안 아파트 전체의 냄새를 맡은 기분. 특히 담배 연기는 울렁거리도록 맡았다.


이상한 소리지만, 그간 풀리지 않던 비밀이 풀려서 뭔지 모를 뿌듯함도 느낀다. 그리고 이거야 말로 이상한 소리인데, 내가 맡았던 냄새가 온갖 세대가 내뿜는 냄새의 총합 같은 것, 통합적인 냄새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경험이 조금 특별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물론 또 겪고 싶은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음미하게 된다. 우리의 냄새를 다 합치면 이런 냄새가 되는구나. 그리고 우리는 철저하게 그 냄새의 역류를 막은 채 사는구나.


그리고 댐퍼가 알려주듯, 총체와 부분 사이에는 사실 아주 작고 사소한 ‘문’이 하나 달렸을 뿐이다. 그 문이 열리는 순간 그 즉시 부분은 뒤집히며 전체로 바뀐다. 그 문이 닫히면 부분은 즉시 전체와 무관한 부분으로 환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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