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11월 17일
한참 전에 에세이 출간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 감사한 한편 놀라운 마음이었다. 그런 제안을 해준 출판사에 무척 감사하면서도 나는 제안을 수락하기까지 되게 많은 고민을 해야 했다.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일인가? 하는 고민이 먼저 들었고, 내가 쓴 책을 과연 누가 읽고 싶을까? 하는 고민도 들었다. 이런 고민은 사실 자연스러운 반응이고 피할 수 없는 고민이다. 그런데 답 없는 고민이 꽤 길게 이어져서 나도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아무래도 선뜻 마음먹을 수가 없으니 그랬을 텐데, 나는 곧 본질적인 면을 고민했다. 책은 왜 쓰는 걸까. 혼자 글 쓰는 일에 만족하지 못하고 책 쓰는 일에 도전할 이유는 무얼까. 지금도 여전히 고민하고 있다. 실은 몇 번이나 책 쓰는 일을 시도했고, 작업을 이어가보려고 했으나 번번이 그만두게 된다.
책을 써야 하는 이유가 분명치 않은 데 반해 책을 쓰지 말아야 할 이유는 많다. 내가 하는 일이 책 만드는 일이라 더 그렇다. 책을 쓰는 일의 고역이 얼마나 큰 지 너무 잘 알고, 책으로 주어지는 보상이 변변치 않다는 것도 잘 알며, 책을 낸다고 해서 꼭 기대한 반응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도 너무나 잘 안다. 사실상 책을 써야 하는 이유보다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해야 한다고 결론내리는 쪽이 현실적으로 마땅해 보인다. 그런 까닭에 나는 책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마다 되묻곤 했다. 책을 ‘왜’ 쓰고 싶은지. 그 명확한 이유를 알면 도움이 될 듯싶으니까. 이유가 분명해지길 바랐다. 그래야 한 글자라도 써질 것 같았다.
언젠가는 그 이유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표현하고 싶어서’. 표현하고 싶어서 우리는 글을 쓰고 그걸 엮어 책으로 만드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 계기가 있었다. 한 활동가분께 화성외국인보호소(수용소)에 갇힌 피해자의 이야기를 듣던 중이었다. 수용소에 부당하게 수감된 이가 있었다. 그가 경찰과 다른 수감자와 특히 자기 자신에게까지 피해를 주는 행동(고성과 난동과 자해)을 멈추지 않자 하루는 그의 구금 해제를 위해 조력하던 활동가가 그에게 물었다. 힘든 마음은 알지만 왜 이렇게까지 하느냐고. 그러자 그가 오히려 놀라면서 대답했다. “왜 이러냐고요? 나는 지금 표현하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멍해졌다. 시간이 지나 이 말을 자꾸 생각했는데, 나는 우리가 써야 하는 이유도 그의 이유와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표현하기 위해서다. 그의 대답은 내게 해방감을 줬다. 덕분에 나는 표현을 하는 데 있어서 보편 영역을 설득하기 충분한 이유가 필요한 것이 아님을, 달리 말하면 표현에 자격이 필요한 것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한편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럼 표현하는 일은 전적으로 좋은가? 하지만 왜 어느 때는 표현하고 싶고, 어느 때는 표현을 삼가고 싶을까. 그리고 표현이란 과연 무엇에 좋은 걸까? 표현이 무언가를 바꾸고 있는가? 이를테면 표현이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가? 세계를 나아지게 하는가? 표현은 개인이 느끼는 억압을 일시적으로 해소시키는 데만 도움되는 것은 아닌가? 그것의 효용이 분명치 않고, 동기 또한 일시적이거나 파편적이라면, 표현을 내뱉는 것과 표현을 참는 것 사이의 차이는 과연 무엇일까?
나는 주제 넘게도 표현의 실효를 따졌다. 수용소에 구금된 피해자의 말을 곱씹으면서 이런 고민을 한다는 사실이 죄스러웠다. 그럼에도 나는 답을 찾고 싶었다. 저 물음들은 마치 세면대에 채웠던 물을 내릴 때 생기는 소용돌이처럼, 같은 자리를 뱅뱅 맴도는 느낌으로 내 안을 휘저었다. 그런 의구심 속에서 나는 곧바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책 쓰는 이유가 분명치 않다고 여기는 그 의구심 가득한 지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결과 나는 또 다시 무척 자연스럽게도 ‘안 쓰는 사람’으로 돌아가 예전처럼 살 수 있었다.
그러다가 한번은 약간 다른 각도에서, 내가 책을 쓰고 싶어 하는 이유를 짐작해본 적이 있다. 『구술문화와 문자문화』라는 책 덕분이었다. 이 책을 읽도록 안내한 것은 팀 잉골드의 『라인스』 1장의 내용이었다.
옹의 책의 논의에 따라, 지금 우리가 속한 정신문화를 ‘문자문화’로 이해하자 그동안 깨닫지 못하던 무언가가 별안간 선명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날 우리는 문자가 기억을 나르고, 문자가 정신의 역할을 담보하는 시대를 살고 있구나. 늘 그랬던 것으로 생각하지만 과거엔 그러지 않았다. 문자문화 시기 이전 구술문화 시기에는 문자가 아닌 말(구술)이 그 역할을 했다. 대략 플라톤 시기 때부터 다양한 사회적이고 정신적인 기능을 우리는 말 대신에 문자에 위탁하며 살게 되었다… 옹의 책을 통해 이런 이야기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즈음 새롭게 든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혹시 내가 책을 쓰고 싶다고 욕망하는 까닭은 이런 이유 때문은 아닐까. 알게 모르게 문자문화의 권위와 보호 속에서 살아온 사람으로서, 책을 씀으로서 문자문화의 일원으로 인정받고자 바랐던 것은 아니었을까? 책을 씀으로써 문자문화 세계 속에 내가 합당히 머물 장소를 마련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인정받는 구성원이 되고 싶은 욕망이 있지 않았을까. 책 쓰기가 문자문화 세계의 거주민이 되는 방법으로 보였던 것은 아닐까. 그러한 그 생각이 들었을 무렵에 이반 일리치의 『텍스트의 포도밭』과 『ABC,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를 다시 꺼내 읽어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책을 써서 문자문화의 일원이 된다’는 생각은 너무 순진하고, 그것만이 내 욕망의 실체였다고 여기기는 어려웠다. 그보다 더한 뭔가가 있지 않았을까. 비록 마음 깊은 곳에는 내 잠재된 생각과 기억과 경험들이 문자로 형상화되는 정신세계에 대한 깊은 애착이 있었다고 하더라도(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것과 문자문화의 생산자 구성원이 되고 싶다는 욕망은 종류가 다른 것으로 보였다. 그럼 나는 왜 책이 쓰고 싶었을까.
이런 고민을 되풀이하다가 깨달은 것은, 어쩌면 나는 책을 쓰고 싶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저 나도 책을 쓰면 좋겠다 정도의 기분을 관성으로 이어왔을 뿐. 정말로 간절히 책을 쓰고 싶은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간절하지 않았기에, 이제껏 책을 안 써도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까지 안 쓴 것이고, 그러니 이제까지 못 쓴 것이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내게는 치열한 열망이 없다고. 이를 깨닫고 나자 기분이 후련했다. 그렇구나. 간단했구나.
최근 며칠 동안 몰두해서 읽은 책은 『팀 잉골드의 인류학 강의』다. 고백하자면 예전에 이 책을 과소평가하며 얕잡아 본 적이 있다. 이 책을 소개할 일이 생겼을 때 “그 얇은 책…”이라고 말하고서 넘어갔는데, 나는 속으로도 이 책의 내용이 그다지 특별한 구석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잉골드가 주요 저작들을 쓰는 사이에 소품처럼 쓴 책이라고만 생각했더랬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읽으니 과거의 내가 부끄러울 정도로 무척 좋은 책이다.
잉골드는 자신에게 인류학이란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과 함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탐구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탐구의 방식으로 무척 중요한 것은 배움이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면 서로가 서로에게 ‘경험’과 ‘상상력’을 배워야 한다. 잉골드는 이것이 중요한 인류학 실천이라고 말한다. 어찌 보면 무척 밋밋하고 흔한 말이지 않나. 그래서 처음에는 이 말을 대수롭지 않게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말을 자꾸 곱씹게 된다.
잉골드의 논의를 몇 가지만 언급하고 싶다. 일단 ‘우리’라는 범주. 잉골드가 말하는 ‘우리’는 인종, 성별, 능력 같은 기준에 의해 혹은 인간인지 인간이 아닌지 등의 기준에 의해 존재가 구분되는 범주가 아니다. ‘우리’는 세계를 형성하는 흐름 속의 우리 모두다. 그러니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제대로 펼치기 위해서는 아주 넓은 그물망이 필요할 듯하다.
그리고 세계는 전도되어 있고 존재는 파편화한다는 인식. 근대의 학문에서는 대개 사회적 삶과 생물적 삶을 분리해서 바라보았다. 이를테면 사회적 진화와 생물적 진화를 동떨어진 현상으로 해석하는 점도 그렇다. 하지만 잉골드가 보기에 이는 근대성이 심화시킨 파편화한 인식 중에서 대표적인 것으로, 살아가는 존재에게서 사회적 삶과 생물적 삶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젠가부터 스스로를 분열되지 않은 통합된 존재로 인식하는 경험을 박탈당하고 있다. 통합된 존재로의 경험을 파편화되고 구별짓기된 세계 구조 안에서 잃고 만다. 생명의 사회적 삶과 생물적 삶을 분리해서 취급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단절된다.
그러니 잉골드의 논의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과 병행하는 것이다. 원래는 생명 안에 통합돼 있던 것을 우리는 언제부터 어떤 이유로 구별하고 분리하기 시작했을까? 이러한 이분법들은 언제부터 어떻게 생겨났을까? 이 뒤집힌 세계에서 우리의 삶은 어디로 무엇을 향해 이어져야 하는가? 잉골드는 『라인스』를 쓸 때 처음 가졌던 질문이 ‘어떻게 말과 노래가 구별되기 시작했을까’였다고 밝히는데, 그가 무엇에 도전하고 있는지를 아마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을 거슬러 원래 생명 안에 통합돼 있던 것들이 구별되고 분리되기 시작한 시점 중 어느 특별한 시점을 찾아가보는 것이다.
아참. 원래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읽기’와 ‘쓰기’에 대한 것이었다. 앞에서 ‘책을 왜 써야 하는가’가 내 고민이었다고 적었지만, 이번에 여러 고민을 해보다가 새삼 깨닫은 것은, 읽기와 쓰기에 대해 다른 경험과 상상력을 배우고 싶다는 갈증과 바람이 꽤 오래 전부터 이어져왔다는 사실이다.
돌이켜보건대 그 시작은 『텍스트의 포도밭』을 처음 읽었을 때였던 것 같다. 『텍스트의 포도밭』은 책의 페이지를 눈으로 바라보면서 머리로 내용을 해석하는 행위가 ‘읽기’의 전부가 아님을 알려준다. 12세기까지만 해도 읽기는 반드시 낭독이 선행돼야 하는 행위였다. 읽기는 개인이 침묵 속에서 머리만 써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당시만 해도 책 자체가 흔치 않았으며, 더군다나 띄어쓰기가 발명되기 전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띄어쓰기의 도움 없이 텍스트를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런 걸 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텍스트 내용을 모두 외운 특별한 사람뿐이었다. 책의 글은 ‘텍스트를 전부 외운 사람이 (바라보면서) 의미 단위로 소리 내 읽을 수 있는 문자 나열’이었고, 달리 말하면 책의 글은 표기법 자체였다. 때문에 ‘읽기’에는 언제나 특별한 낭독자가 필요했다. 낭독자가 소리 내서 단어를 발성하면, 곁에 모인 사람들은 낭독자의 목소리로 물성화된 단어를 귀에 넣었다. 일리치는 12세기에 이어지던 ‘읽기’의 풍경이 이러했음을 전해준다. 이때의 읽기는 상당한 퍼포먼스였고, 몸짓을 수반하는 깊은 묵상에 가까웠다.
십수 년 전 처음 이러한 ‘읽기’에 대해 들었을 때 당연히 무척 인상적이었으나, 이런 사실이 지금의 나의 읽기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지를 상상해보지는 못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라인스』를 읽으며, 내게는 뜻밖에도 12세기의 읽기의 풍경이 자꾸 떠올랐다. 다른 읽기의 경험을 통해 다른 상상력을 배울 수 없을까. 이전까지 나는 주로 이런 걸 고민했던 것 같다. ‘나는 무얼 읽고 싶나’ ‘나는 무얼 쓰고 싶나’ 같은 생각들. 그리고 지금의 읽기와 쓰기의 대상들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궁금해했다. 그런 고민은 늘 이런 생각으로 수렴했던 것 같다. ‘무얼 읽어야 하나’, ‘무얼 써야 하나’. 하지만 꼭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을까. 다르게 생각하면 늘 ‘읽기’와 ‘쓰기’는 계속되고 있으며, 그 속에서 세계가 생겨나는 것은 아닐까? 더군다나 읽기와 쓰기는 꼭 문자 도구로만 이뤄져야 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지 않나? 읽기와 쓰기를 꼭 언어 행위로 생각하지 않으면 어떨까.
하늘을 바라보는 일? 읽기다. 빗방울이 피부에 닿는 감촉을 느끼는 일? 읽기다. 밤하늘의 별의 반짝임을 보는 일? 읽기다. 동네 고양이가 이동한 자취를 알아보는 일? 읽기다. 고속도로 표지판 사인에서 이상한 점을 알아차리는 일? 읽기다. 조리법의 미묘한 변화로 음식 맛이 달라진 것을 깨닫는 일? 읽기다. 산길에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 발을 어디를 디딜지 살피는 일? 읽기다.
그럼 손을 움직여 무언가 쓰는 동작은? 쓰기다. 걷는 일은? 쓰기다. 바다를 헤엄치며 물살을 가르는 손에 가하는 힘은? 쓰기다. 점액을 묻히며 나아가는 달팽이의 자취는? 쓰기다. 털실로 목도리를 뜨는 것은? 쓰기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빛을 캔버스에 그리는 일은? 쓰기다. 텃밭에 조르르 시금치를 심는 일은? 쓰기다. 감자를 심으려고 흙을 올려 기다랗게 두둑을 쌓는 일은? 쓰기다.
읽기와 쓰기는 사실 어디로든 어떻게든 이어지는 열린 경험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세계는 배우고 싶은 이들의 방랑을 기다리는 충만한 성소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나.
최진규, 「읽기와 쓰기의 대화」, 『어떤 읽기』, 어떤출판연구회, 2024